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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일보 시론(時論) 역사의 때와 장소, 변증

뉴욕일보 | 기사입력 2024/04/03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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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일보 시론(時論) 역사의 때와 장소, 변증
 
뉴욕일보   기사입력  2024/04/03 [00:41]

  © 뉴욕일보

이길주 박사<버겐커뮤니티칼리지 역사학과 교수>

 

역사의 변화는 때와 장소, 또는 시간과 공간이 합쳐져 생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행동한다”는 지적이 있다. 이런 행동은 에너지 낭비거나 주변에 해가 된다. 반대로 때와 장소를 잘 가리는 일은 행동하기에 적절한 시점과 그 행동이 효력을 발생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음을 말한다. 이때 역사는 움직인다.

 

  © 뉴욕일보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의 무장단체 하마스가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 남부를 공격했다. 그리고 이러한 전례 없는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10월 11일 이스라엘 전투기가 출동해 해당 가자 지역을 공습하면서 주민들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됐다. 공습을 당한 가자 지구 내 리말의 한 아파트 단지 주민들은 “우린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렇게 조용하고 아름다웠던 동네에 안전한 곳이 남아있긴 한가?”라고 통곡하고 있다. 

 

지난 해 10월 7일 가자 지구를 거점으로 한 하마스 무장세력이 이스라엘에 침투해 다수를 무차별 살상하고 인질을 잡아서 가자로 도주했다. 인질 중에는 노약자 어린이도 포함되었다. 다수의 인질이 아직도 억류되어 있다. 생사도 불확실하다.

이스라엘은 이 사건을 하나의 “때”로 확보했다. 눈의 가시 하마스를 무찌를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  이스라엘의 허를 찌른 하마스 침투 작전 치밀함과 잔혹함이 대대적 반격의 때, 기회를 만들어 냈다. 하마스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판적 시각이 적기(適期)를 제공해 주었다. 지금 가자는 이스라엘이 복수심을 분출하는 장소일 뿐이다.

 

여기서 지금 역사가 만들어 지고 있다. 첫째는 폭력의 역사이다. 3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생존자들은 대대적인 기아의 위험에 처해있다. 의료 시스템은 붕괴되었다. 가자는 인간이 처해질 수 있는 최악의 시간과 공간을 말하는 아마겟돈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도 이스라엘의 복수 작전은 흔들리지 않는다.  

가자는 이스라엘의 무대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가 가져올 결과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게 목적이다. 요르단 강 서안지구(West Bank),는 물론, 이스라엘에 반하는 세력들이 이 폭력과 살상극의 관람객이다. 이 무대에서 커튼은 쉽게 내려오지 않는다. 관람객들이 경악하면 할수록 공연은 열기를 더 할 것이다.

팔레스타인들도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 공습으로 무너져 내린 공간 가자의 현실을 통해 “때”를 만들어 내려한다. 유대인 대학살이 상징하는 역사의 피해 민족, 중동 유일의 민주주의 국가, 키부츠가 상징하는 진보성의 사회란 아우라를 걷어내고 이스라엘에 내재된 무자비한 폭력성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기회를 만들려 하고 있다. 가자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대형 야외 극장과 같다. ‘이스라엘의 진면목’이 상영되고 있다. 이제 까지 이런 규모의 리얼리티 상영물은 없었다.

 

지금 가자에서는 또 하나의 역사가 펼쳐진다. “‘정(正)→반(反)→합(反)’ 변증법의 역사이다. 테러가 변증법의 ‘정(正)’이다. 여기에 국가의 무력이 반응하고 있다. 말 그대로 ‘반(反)’ 이다. 그러면 ‘합(反)’은 무엇인가?

세계의 유대인 사회가 변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독립국가, 민족공동체로 존재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확고한 신념이고. 역사의 사명이며, 실존의 요구이다. 나아가 시온주의자들에게 이스라엘은 신령한 약속의 회복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최고 가치인 존재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유대인 사회로부터 나오고 있다. 더 정확히는 이스라엘 밖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평화 없는 존재는 존재가 아니라 외치고 있다.

테러와 국가폭력의 충돌에서 튀어나오는 스파크가 평화 공존의 비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 변증이 국제 사회에 퍼져 나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뉴욕 출신 찰스 슈머 연방 상원의원의 최근 의회 연설이다. 슈머 의원은 유대계 미국인으로, 연방 상원 다수당 원내 대표이다. 그의 연설이 초미의 관심사인 이유이다. 그의 연설은 중심 기둥을 중심으로 네 개의 또 다른 기둥들이 모퉁이를 떠받들고 있다. 이 다섯 기둥의 모습은 다음이다.

 

△ 중심 기둥: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흔들림 없는 확고한 지지이다. 홀로코스트 피해자 가정 출신인 그에게 이스라엘의 존재는 신성하다. 그는 이스라엘을 “뼈에 사무치도록 사랑한다(We love Israel in our bones)”고 했다. 그가 사랑하는 땅, 사람들, 역사를 제대로 지키려면 장기적 해결책이 요구된다.

 

△ 모퉁이 기둥 1: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민족은 하나가 될 수 없다. 이것은 허황된 꿈이다. 둘로 갈려야 한다. ‘두개 국가 병존 방식(Two State Solution)’이다. 갈라진 이 두 집단은 존중하고 수용해야 할 철칙이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독립성을 인정해야 한다. 팔레스타인 민족은 이스라엘의 존립에 위협적 존재가 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 모퉁이 기둥 2: 기둥 1일 제대로 서 있으려면,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에 이스라엘 정착촌이 들어설 수 없게 해야 한다. 팔레스타인의 주권을 지키지 못하는 정부는 무력화 될 것이고 가자 지구처럼 그 자리를 하마스와 같은 무장세력이 메울 것이 자명하다.  

 

동시에 이스라엘 탄생이 불러온 강제 추방 또는 이주의 피해자들인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원위치로 다시 이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소위 ‘Right of Return’ 요구를 포기해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은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 사람은 팔레스타인에 살면서, 서로의 땅을 탐내거나 넘보지 말아야 한다.  

흔히 말하는 요단강에서 지중해까지가 자기 땅이라 외치는 극렬분자들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지도력을 행사하면 안된다. 나아가 이 구호는 모든 이들의 뇌리와 심장에서 사라져야 한다.

 

△ 모퉁이 기둥 3: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은 주변 국가의 협력이 필수이다. 사우디 아라비아, UAE, 이집트, 요르단 및 그외 주류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나라의 안전을 보장하고 팔레스타인의 개발을 지원해야 한다. 그래야 총기 대신 부삽을 들고, 미사일 대신 중장비를 들여 올 것이다.

 

△ 모퉁이 기둥 4:  슈머 의원의 연설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이다. 미국의 정책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미국은 이스라엘의 초강력 지지, 지원 국가이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우익, 극단주의 세력이 이스라엘의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팔레스타인인들과의 평화 공존을 거부한다면,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가 중동의 평화와 안정이라는 자국의 포괄적 정책 목표에 부합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use the tools at its disposal to make sure our support for Israel is aligned with our broader goal of achieving long-term peace and stability in the region.”)

슈머 의원의 연설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일단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讐)‘의 관계를 깨자는 주장이다. 먼저 ’일기대천지족(一起戴天之族)‘으로 바꾸고 종국에는 동주상구(同舟相救)의 관계로 가자는 것이다. 영화 대부 1편(Godfather I)에 나오는 대사로 유명해진 손자병법의 전략적 사고와 같다. “Keep your friend close; keep your enemy closer.” (친구를 가까이 하지만 적일 수록 더 가까이 두어야 한다)“.

슈머 의원은 연설 끝 부분에서 성서를 인용했다. In Scripture, we read about how God created the world from an infinite void — that out of the greatest darkness can come the greatest light.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이 없는 어두움에서 천지가 창조되는 순간을 상기시키며, 무거운 어두움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위대한 빛이 비추길 기도했다.

 

“성난 화마가 남긴 잿더미 속의 불씨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촛불을 밝히자(From the ashes, may we light the candles that lead us to a better future for all)”는 그의 변증적 호소가 우리 모두의 바램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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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4/04/03 [00:41]   ⓒ 뉴욕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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